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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세계 지식인 지도: 인지과학이란… (김기현, 중앙일보, 2001)2023-04-13 17:14
Name Level 10

세계 지식인 지도: 인지과학이란… (출처: 중앙일보 2001년 11월 1일)


인지과학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 또는 인지가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연구하면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전산학, 인지심리학, 철학, 언어학, 신경생리학, 동물학 등이 함께 참여하면서 구성된, 이제 겨우 50년 남짓의 역사를 가진 신생 학문 분야다. 컴퓨터 과학, 그 중에서도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지과학 형성의 모태를 이룬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초보적인 지능 작업을 흉내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에서 출발한다. 오늘날의 산업 생산 현장에서 이전에 사람들이 하던 일을 컴퓨터 장치와 로봇이 대신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바로 인공지능이 발전한 결과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지능, 인지 자체도 일정한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고, 이러한 생각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인지과학이 발생하게 된다.

어떤 사물을 보고 그 사물이 무엇인가 판단하는 경우를 보자. 내가 나무를 보는 경우 외부의 나무는 나의 망막에 일정한 모습을 지닌 시각적 상(像)을 맺는다. 망막에 맺힌 상은 조명이 나빠 흐리게 주어질 수도 있고, 다른 사물에 부분적으로 가려서 불완전하게 주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 체계는 망막에 맺힌 불완전한 영상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 영상의 원인인 외부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용하게 알아맞힌다. 이러한 과정은 문제를 내는 사람이 단서를 주고, 대답하는 사람이 그 단서에서 출발해 정답을 맞히는 퀴즈의 경우와 유사하다. 문제를 푸는 사람은 단서들을 종합하고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이런 저런 생각을 도출하며 이로부터 답을 찾으려 한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여러 추론이 개입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망막에 일정한 영상이 맺히면 우리의 시각 체계는 그 영상의 색을 탐지하고, 영상에 주어진 음영을 분석해 부분적 형태들을 탐지 종합하고, 다시 색과 형태를 결합해 그 영상의 원인인 외부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시각 판단에 도달한다. 결국 시각에서 보이는 인지 과정은 시각 영상을 단서로 하여 외부 대상을 알아맞히는 문제 해결의 과정이며, 이 과정이 컴퓨터에서와 같은 프로그램에 의해 수행된다는 것이 인지과학의 기본적 입장이다.

인지심리학은 여러 실험을 통해 인간의 인지 과정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현상을 드러내면서, 정보 처리장치에 대한 가설을 통해 이들 현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인지신경생리학은 두뇌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정보처리 방식에 대한 나름의 가설을 제시하기도 하고 인지심리학의 가설이 두뇌의 실제적 구조와 합치하는가를 검증하기도 하면서 협력 연구에 참여한다. 언어학은 인간의 정보 처리의 전형적인 형태인 언어 현상을 인지심리학, 신경생리학과 더불어 연구한다. 철학은 인지과학에 담겨 있는 마음에 대한 기본적 입장이 무엇인가를 해명하고, 이 입장이 갖는 의의는 무엇이며, 또 그 한계는 무엇인가 등의 반성적인 작업에 참여한다.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 kihyeon@snu.ac.kr)